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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식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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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인식은 1889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후 충청남도 도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충청남도지사 직무대리와 도지사를 역임했으며, 군산해양대학 학장과 영명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5년 대전에서 사망했으며, 영명학교 학교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2. 생애

황인식은 1889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뒤 1905년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 1909년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로 진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2년 6월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조선총독부로부터 항일 독립운동 내통 혐의로 감시받았다.[1]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획, 공주읍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1] 192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롬비아 덴버 대학에 입학,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했다. 1925년 졸업 후 콜롬비아 사범대학 교육학과로 진학하여 1926년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여 영명학교 교사로 복직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1] 혐의없음으로 석방되었으나, 2년간 교원 자격을 취소당했다. 1932년 복직하였다. 1937년 안신영의 창가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혐의없음으로 석방되었다. 1940년 프랭크 윌리엄스가 강제 축출되자 일시적으로 영명학교 교장 직무대행을 맡았다.[2] 1942년 영명학교가 강제 폐교되면서 교직에서 물러났다.

1945년 해방 직후 충청남도지사 직무대리에 선임되어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미군정 최고 고문관으로 선임되었고, 윌리엄스 목사의 아들 저르 윌리엄스의 추천으로 아놀드 군정장관의 고문이 되었다. 1945년 11월 충청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다. 1946년 독직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3] 이후 영명학교 재건을 준비하였다.

1947년 군산해양대학에 조선학과 신설을 인가받고 학내 기강 체계를 마련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충청남도 고문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공주 영명학교를 복설하여 공주영명상업중학교공주영명상업고등학교로 개교하였다.[5] 1957년 정년 퇴임하였다.

1954년 3.1절 기념식을 공주읍내에서 주관하고,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였다.[6] 이후 공주 노인회장을 역임하다가 1965년 4월 12일 대전에서 향년 76세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1889년 ~ 1919년)

황인식은 1889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뒤, 서구의 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고 신문물을 익히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공주의 신식 학교인 영명학교에 들어갔다. 1909년 영명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로 진학하여 평양에서 하숙하며 생활했다.

1912년에 숭실학교를 졸업하였다. 한일 합방으로 공직의 길을 단념하고 1912년 6월 고향 공주로 내려와 모교인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불령선인으로 지목된 그는 공주 영명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내통을 의심받고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시, 내사를 당했다.

2. 2. 독립 운동과 미국 유학 (1919년 ~ 1927년)

1919년 1월부터 영명학교의 동료 교사인 김근배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 준비하였다.[1] 그해 3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3.1 만세 운동에 참여, 공주읍내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1921년 영명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 뉴욕주 콜롬비아 덴버 대학에 입학했다. 후원자가 없어 상점 점원과 막노동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였으므로, (성적이) 상위권에 들지는 못하였다. 1925년 6월 뉴욕 콜롬비아 덴버 대학을 졸업하고, 콜롬비아 사범대학 교육학과로 진학했다. 1926년 12월 콜롬비아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귀국 여비를 마련하여 1927년 봄 귀국하였다. 그해 3월 다시 영명학교 교사로 복직하였다.

2. 3. 광주학생운동 참여와 투옥 (1929년 ~ 1945년)

1929년 11월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성추행 사건으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정숙 등의 동맹휴학 권고에 협력하여 영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 운동을 주도하였다.[1] 그해 11월 황인식은 다른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당하였다가 대전지검 공주지청 형사사건부로 송치되었다가, 혐의없음 판정을 받고 곧 풀려났다. 그는 평소에도 조선총독부 경찰들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검문검속 없이 바로 투옥당하였다. 총독부 학무과의 훈계를 받고 불기소 방면 처분으로 석방되었으나, 불기소 방면이 된 후에도 그는 교육자가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것만 해도 죄가 된다는 이유로 2년간 교원 자격을 취소당하였다. 이 기간 중 그는 생계 곤란을 겪었으며 1932년에 복직하였다.

1937년 7월 평양 숭실학교 음악 교사 안신영(安信永)이 음악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불온한 창가(唱歌)를 가르쳤다 하여 평양경찰서에 연행, 투옥되었다. 이때 그도 창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평양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나 곧 혐의없음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1940년 1월 태평양 전쟁 때 총독부가 설립자이자 1·2대 교장 프랭크 윌리엄스를 강제 축출하자, 일시적으로 영명학교 교장 직무대행을 맡다가[2], 1941년 12월에는 다시 총독부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영명학교를 강제폐교함으로써 교직에서 물러났다.

2. 4. 해방 직후 활동과 충청남도지사 재임 (1945년 ~ 1947년)

1945년 8월 해방 직후 일본인 마수나가 히로시(增永 弘) 충청남도지사가 사퇴함에 따라 충청남도지사 직무대리에 선임되었다. 황인식은 업무 인수인계 및 치안 유지를 담당하며 혼란을 수습하고, 충남 도내에 잔류한 일본인조선인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유혈 사태와 보복 범죄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하였다. 그해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 군정 중앙 정부의 최고 고문관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한국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때 군정청 최고관리 중 한 명이자 윌리엄스 목사의 아들인 저르 윌리엄스(우광복(禹光福))의 초청을 받고 서울특별자유시로 상경했다. 1906년 공주선교사로 부임하여 선교와 교육 활동을 하던 프랭크 윌리엄스 목사의 아들 저르 윌리엄스의 추천으로 아놀드 군정장관의 고문이 되었다.

1945년 11월, 미군정 하에서 각 도지사를 임명할 때 현지 연고자를 임명하겠다는 존 하지의 정책에 따라 충청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식민 정책에서 벗어난 직후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질서 유지에 특히 힘썼으며, 이로 인해 다른 도(道)에서 충청남도 도정을 견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6년 6월 초 독직혐의로 군정청 대법원에 기소되었으나, 혐의없음으로 판정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3] 이후 6월 18일 충청남도지사직을 사퇴하고 영명학교 재건을 준비하였다.

2. 5. 군산해양대학 학장 및 영명학교 교장 재임 (1947년 ~ 1957년)

1947년 9월 20일 과도정부에 건의하여 군산해양대학의 조선학과 신설을 인가받고, 20명을 추가 선발하여 그해 2학기부터 입학시켰다. 중앙정부와 시에서 주는 사업비와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고, 신축 교사 공사를 추진했으며, 교훈, 해대가, 해양가, 응원가, 과실 점수 규정, 불침범 수칙 등을 만들어 학내 기강 체계를 마련하였다.

1947년 11월 16일 황인식은 학부형 창립총회를 만들고, 초대 이사장에 학부형 박봉서, 부이사장에는 서울 학생의 학부형인 정영기, 고문봉을 선임하였다. 이사에는 최병선, 임영순, 정영기, 오경달(공주 출신), 남궁열, 이지우, 김주성(이리 출신), 이영하, 윤영규(부산 출신), 감사에 장경환, 구장환(서울 출신), 간사에 박래진, 양현, 고문에 조선해양대학장, 군산시장, 해양경비대 군산경비사령관 등을 선발하여 학교운영지원회 규정을 만들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충청남도 고문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도정을 자문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태평양 전쟁 때 폐교되었던 공주 영명학교를 복설, 공주영명상업중학교(공주영명중학교의 전신)와 공주영명상업고등학교(공주영명고등학교의 전신)로 개교하였다.[5] 1957년 1월까지 제3대 교장으로 재직하고 그해 7월 정년 퇴임하였다.

1954년 3월 7일에는 3.1절 35주년 기념식을 공주읍내에서 주관하고,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였다.[6]

2. 6. 생애 후반과 사망 (1957년 ~ 1965년)

1957년 1월까지 공주영명상업중학교(공주영명중학교의 전신)와 공주영명상업고등학교(공주영명고등학교의 전신) 제3대 교장을 지내고 그해 7월 정년 퇴임하였다.[5] 1954년 3월 7일에는 공주읍에서 3.1절 35주년 기념식을 주관하고,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였다.[6] 이후 공주 노인회장을 역임하다가 1965년 4월 12일 대전에서 향년 76세로 사망하였다.

3. 사후

장례식은 공주 영명학교 학교장(學校葬)으로 거행되었으며, 장례식을 주관한 공주제일교회의 조창석 목사는 그가 가족과 목사가 보는 가운데 마치 자는 듯이 흠 없고 깨끗한 모습으로 천국으로 가셨다고 평하였다.[4] 공주 영명학교 전면에 있는 앵산공원에는 영명학교 출신이자 이 학교를 다시 재건한 것을 기려 그의 공적비가 세워졌다.[4] 공적비에 새겨진 시는 시인(詩人) 이원구(李元九)가 지었다.[4]

참조

[1] 뉴스 동아일보 1974-03-01
[2] 뉴스 경향신문 1949-10-01
[3] 뉴스 동아일보 1947-06-07
[4] 뉴스 경향신문 1947-07-31
[5] 뉴스 경향신문 1949-10-01
[6] 뉴스 경향신문 195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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